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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고척] 김동윤 기자=10년 전, 선배 배영수(39)로부터 실책을 저질렀음에도 “괜찮다”며 격려를 받던 신인이 어느덧 후배에게 “괜찮다”며 다독이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했다.파워볼게임

7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삼성 라이온즈는 키움 히어로즈에 13 – 2 대승을 거뒀다. 이날 김상수(30)는 선발 2루수 겸 1번 타자로 출장해 5타수 3안타 2득점 1타점을 기록하며 팀 승리의 선봉장이 됐다. 53경기를 치른 현재, 타율 0.333, OPS 0.846을 기록한 김상수는 커리어 첫 3할 타율에 도전한다.

경기가 삼성 쪽으로 기운 8회 말에는 김상수를 대신해 신인 김지찬(19)이 2루 수비에 나섰다. 나서자마자 이지영(땅볼)과 김하성(뜬 공)을 잡아낸 김지찬은 9회 초 타석에서도 진루타를 만들며, 팀의 마지막 득점에 기여했다.

지난해 드래프트에서 2차 2라운드로 삼성에 지명된 김지찬은 드래프트 후 본인의 롤모델로 김상수를 언급했다. 올해는 주로 대주자 혹은 대수비 요원으로 쓰일 예정이었지만 주전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고졸 신인임에도 예상보다 많은 타석에 나서고 있다. 특히 지난 6월 24일, 타일러 살라디노(30)의 부상 이후로는 9경기 동안 꾸준히 선발 기회를 받으면서 롤모델인 김상수와 키스톤 콤비를 이루기도 했다.

최근 경기장에서 세레머니를 함께하는 등 김지찬과 어울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김상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지찬이를 보면 어릴 때 생각이 많이 난다”고 얘기를 꺼냈다. 김상수와 김지찬의 나이 차이는 11살 차. 하지만 김상수는 어려운 선배보다는 뭐든 함께 하는 편한 선배를 목표로 삼았다.

함께 하는 세레머니와 장난도 그런 과정이었다. 김상수는 “(김)지찬이에게 항상 재밌는 말을 해주려 노력한다. 다치면 손해라고 조언도 해준다. (편한 선배가 되고 싶어) 내가 먼저 다가갈 때도 있고, 장난도 친다”고 얘기했다.

7일 경기까지 김지찬은 55경기 중 49경기(20경기 선발)에 출전하면서 21안타 5타점 16득점 6도루(1 도루실패), 타율 0.241, OPS 0.540을 기록 중이다. 11년 전, 같은 나이에 데뷔 시즌을 치렀던 김상수는 97경기 동안 59안타 17타점 43득점 18도루(6 도루실패), 타율 0.244, OPS 0.631을 기록했다.

아직까진 아쉬운 타격 성적을 보여주고 있지만 김상수는 19살의 김지찬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선배 배영수에게 괜찮다며 격려를 받던 과거의 자신과 비교한다면 현재의 김지찬이 나은 부분이 있다는 것. 김상수는 “일단 나보다 (김)지찬이가 확실히 야구 센스는 있다. 그 시절, 함께 뛰어보지 않아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지만 스피드나 콘택트 능력도 당시의 나보다 나은 것 같다”면서 “앞으로 우리 팀을 이끌어갈 중요한 선수가 될 것”이라며 후배의 성장을 기대했다.

1부리그 소속 체르노 모레, 2군 팀 선수로 공백 채워 경기

체르노 모레의 경기 모습 [구단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체르노 모레의 경기 모습 [구단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최송아 기자 = 선수와 감독 등 16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불가리아 프로축구팀이 유소년팀 감독과 2군 선수로 공백을 채워 나선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파워사다리

7일(현지시간) 불가리아 바르나의 티차 스타디온에서 열린 아르다 커르잘리와의 2019-2020 불가리아 1부리그 유로파리그 플레이오프 8강전에 나선 홈 팀 체르노 모레는 코로나19 탓에 선수단의 상당 부분이 이탈한 채 경기를 준비했다.

일리안 일리에프 감독과 주치의를 비롯해 팀 구성원 16명이 최근 코로나19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이면서다.

이 팀은 앞서 2일 차르스코 셀로와 원정 경기를 치렀는데, 상대 팀에 코로나19 감염자가 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경기 전 진행된 검사에서 상대 팀 선수 한 명이 양성 반응을 보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뛰었고, 확진자 발생 사실이 알려진 뒤 검사해보니 무더기 확진자가 발생한 것이다.

선수만 12명 감염된 데다 감독까지 빠진 상황.

양성 판정을 받은 이들이 모두 격리돼 아르다와의 경기를 정상적으로 치를 수 없는 위기에 놓였으나 체르노 모레는 ‘잇몸’으로 버텼다.

구단 홈페이지와 AP 통신 등 외신에 전해진 경기 소식에 따르면 이날 체르노 모레의 벤치에는 유소년팀 감독이 와서 앉았고, 선수 공백은 2군 팀의 어린 선수들이 와서 채웠다.

체르노 모레는 전반 18분 터진 이스마일리 이사의 결승 골을 끝까지 지켜 극적인 1-0 승리를 챙기고 플레이오프 준결승에 진출했다.

한편 체르노 모레의 집단감염을 유발한 선수가 속한 차르스코 셀로에서도 선수 3명이 더 코로나19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이는 등 불가리아 프로축구에서는 구성원의 확진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OSEN=인천, 한용섭 기자] SK 와이번스의 7일 현재 1군 엔트리에 포수진은 이현석(28)과 현원회(19) 2명이다. 이현석은 지난해까지 통산 16경기 출장했고, 현원회는 대구고를 졸업한 신인이다. 파워볼중계

SK의 안방은 올 시즌 부침이 심하다. 69억 FA 이재원은 개막 3경기째 손가락 골절 부상으로 이탈했다. 이재원의 이탈로 지난해 군 제대한 이홍구가 주전 포수로 출장했다. 2년간 현역 복무로 실전 감각이 부족했다. 두산과 트레이드로 이흥련을 영입, 공수에서 활약으로 트레이드 효과를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이흥련은 6월 20일 가슴 근육 부상으로 이탈했다. 이재원이 부상에서 복귀했으나 타격 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 이제 이현석에게 주전 포수 중책이 맡겨졌다. 

박경완 SK 감독대행은 7일 포수진 운영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당분간 이현석 체제로 간다. 이홍구는 시즌 초반 기회를 많이 받았다. 지금은 이현석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원과 이흥련은 복귀에 시간이 걸릴 전망. 이흥련은 8월이 되어야 정상 컨디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행은 “이흥련은 이번 달에 복귀가 쉽지 않다. 근육이 찢어져 출혈이 있다. 타격에도 문제가 있지만, 공 잡을 때 스트라이크존에서 빠지는 공을 포구할 때 문제가 있다. 빨리 부르지는 않을 생각이다. 7월에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재원도 팀 성적이 하위권이라 복귀를 서두른 감이 있다. 박 대행은 “빨리 올렸다. 2군에서 충분히 컨디션을 회복해서 올릴 생각”이라고 했다. 이재원은 6월말 1군에 올라와 11경기에서 타율 1할1푼1리(36타수 4안타)로 부진했다. 지난 3일 2군으로 내려갔다. 

SK의 안방은 10개 구단 중 가장 약하다. 포수진 타율은 1할7푼2리로 2할도 되지 않는다. OPS는 .448이다. 롯데(타율 .227-OPS .588), 삼성(타율 .223-OPS .643)보다 낮다. 이흥련이 그나마 2할4푼대 타율과 결정적인 홈런으로 활약했으나, 나머지 3명은 1할이다. 

# SK 포수진 성적 (7일 현재)
선수     이닝         타율    도루허용/저지 도루 저지율
이재원 104⅓  1할1푼1리     13/5      27.8%
이흥련 148⅔  2할4푼2리   18/3     14.3%
이홍구 124⅓  1할7푼8리    14/2      12.5%
이현석 103     1할2푼2리     7/3      30.0%

박 대행은 이현석에 대해 “배터리 코치였을 때부터 봐 온 선수다. 송구와 포구는 누구 못지 않게 빠르고 정확하다. 경기 운영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미흡하고 미지수다. 내가 현석이 정도 게임을 뛰었을 때는 현석이보다 못했다. 포수 희망의 불씨라고 생각한다. 이 기회 잘 살려서 좋은 선수 됐으면 한다”고 기를 불어넣어 줬다.  

그러면서 “이재원이 복귀해도, 이현석의 움직임에 따라 경쟁할 수 있다. 이흥련이 복귀하면 3명이서 경쟁 구도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당장 주전 포수로는 무게감이 떨어진다. 7일 선발 문승원과 호흡은 좋았으나, 공격에선 3타수 3삼진으로 물러났다. 

▲ ▲ 전 세계 야구팬을 향한 두 번째 메시지를 전한 롯데 ⓒ롯데자이언츠
▲ ▲ 전 세계 야구팬을 향한 두 번째 메시지를 전한 롯데 ⓒ롯데자이언츠

[스포티비뉴스=고봉준 기자] 롯데 자이언츠(대표이사 이석환)가 오는 7월 10일(금)부터 진행될 두산과의 홈 3연전(10~12일)을 맞아 전 세계 야구팬을 위한 두 번째 응원 메시지를 전달한다 롯데는 지난 5월 안전상의 이유로 야구장에 함께하지 못하는 전세계 야구팬들을 위해 ‘Stay Strong’(힘내자)을 비롯, 여러 메시지를 외야석과 선수단 장비에 담은 바 있다. 해당 메시지는 해외 중계 등을 통해 소개됐고, 이를 접한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에선 최근 구장 내 전광판을 통해 ‘감사합니다. Baseball is Strong(야구는 강합니다)’란 메시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구단은 해외 구단의 메시지에 화답하고자 2차 응원 메시지 전달을 계획했다. 2차 응원 메시지는 ‘Unity in Baseball’(야구로 하나되자)로, LED 전광판과 선수단이 착용할 이벤트용 모자를 통해 노출될 예정이다. 메이저리그는 개막을 앞두고 있고 대만과 일본프로리그는 뒤늦게 개막해 리그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무관중 경기가 진행 되는 등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만큼, 결국 전 세계가 야구로 하나되길 기원하는 바람을 응원 메시지에 담았다. 한편 선수단은 해당 기간 3개 리그(미국, 일본, 대만) 응원팀을 선정해 이벤트용 모자에 특별 패치를 부착한다. 특히 이대호 선수는 해외 진출 시 몸 담았던 구단인 시애틀 매리너스, 소프트뱅크 호크스, 오릭스 버팔로스를, 송승준 선수는 보스턴 레드삭스 패치를 부착할 예정이다.

[점프볼=김용호 기자]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이 개장한 5월 1일, 또 한 명의 MVP가 은퇴를 발표했다. 선수 생활 내내 묵직한 리더십으로 후배들 신망이 두터웠던 박상오가 2019-2020시즌을 끝으로 코트에 작별을 고한 것이다.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아쉬워했을 정도로 그의 은퇴는 다소 갑작스러웠다. 그는 정말 열심히 했던 선수이자 ‘희망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 본 인터뷰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6월호에 게재된 글이며, 은퇴 선언 직후인 5월 14일에 진행됐습니다.

박상오가 은퇴를 고민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2018년에도 FA가 됐을 때 현역 연장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그 고민을 해결해준 인물은 은사였던 추일승 전 감독이었다. 고양 오리온의 수장이었던 추일승 감독의 제안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지난 2시즌간 박상오는 나쁘지 않았다. MVP시절처럼 펄펄 날았던 건 아니지만, 고참 역할과 함께 후배들의 부상 공백도 잘 메워내며 알차게 보냈다. 그렇기에 FA가 된 박상오가 새로운 계약을 맺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었다. 하지만 박상오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정을 내린다.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것. 그는 자신이 정해놓은 가치관에 따라 정들었던 유니폼을 벗었다.

Q. 은퇴를 선언한지 2주가 지났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어떻게 지내셨나요?
요즘 술 약속이 많아요(웃음). 은퇴를 한다고 하니까 정말 많은 분들이 고생했다면서 술 한 잔 사주겠다고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오히려 쉬지 못하고 더 바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Q. 역시 연락을 많이 받으셨을 텐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뭐였나요?
아픈데도 없고, 튼튼해보여서 1~2년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제일 많았죠.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은 좋죠. 근데 은퇴 의사가 워낙 확고했던지라 흔들리지는 않았어요. 한국나이 40살까지 현역 생활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거예요. 아, 은퇴 발표를 하고나서 개그맨 정범균, 송중근 씨가 유튜브 ‘슬램덕후’에도 초대해주셨어요. 재밌게 촬영을 했는데, 저를 위한 영상편지도 준비해주시고 감사패도 가장 먼저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해요.
 

Q. 여전히 박상오 선수의 은퇴 선언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긴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은 계기가 뭐였나요.

사실 FA 시장에 나가서 구단들의 연락을 조금 기다려볼 수도 있었죠. 근데 작년 비시즌부터 ‘이번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운동했어요. 오리온을 떠나더라도 다른 팀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오리온에서 마무리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죠. 원래 제 목표가 38살까지 뛰는 거였는데 2년을 더 뛰었잖아요. 그래서 미련 없이 끝냈죠.

Q. 몇몇 선수들처럼 전에 뛰었던 KT나 SK에서 은퇴 시즌을 정해놓고 뛸 생각은 없었나요?
그랬으면 좋았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은퇴를 할 뻔했던 선수를 받아준 건 오리온이었잖아요. 2년이라는 기회를 준 팀이라 너무 감사했어요. 사실 경쟁이라는 걸 너무 오랫동안 해왔어요. 오리온에 온 이후로는 경쟁의식은 제쳐두고 조력자로서 후배들을 아우르려 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마음 편히 운동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죠.
 

2007년 2월 1일에 열렸던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부산 KTF 추일승 전 감독이 박상오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나이는 27살이었다. 입단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3살 더 많았다. 박상오는 중앙대 시절 한 차례 농구부를 떠났었고, 군 복무도 일반병으로 지낸 뒤 다시 복귀를 선언했었기에 났던 차이였다. 본인의 선택으로 핸디캡을 안은 채 프로 생활을 시작한 탓인지, 마음가짐과 자세만큼은 누구보다 혈기왕성했다. 덕분에 2010-2011시즌에는 정규리그 MVP를 차지했고, 603경기에서 4,977득점 1,996리바운드 807어시스트 398스틸 158블록의 누적 기록을 남겼다. 정규리그 600경기 이상 출전은 통산 12호 기록이었다. 프로 생활 시작은 남들보다 훨씬 늦었지만, 그는 어렵게 잡은 기회인만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해냈다.


Q. 은퇴 시즌이 코로나19로 조기 종료됐네요. 이 부분은 좀 아쉬울 것 같은데요.
정규리그 통산 5,000득점을 채우지 못했어요. 5,000득점은 상도 주시잖아요. 집에 여태까지 받았던 트로피들을 한데 모아놨는데 그게 쌓일 때마다 너무 뿌듯하거든요. 기록에 개의치 않는 편이긴 했지만, 27살에 늦게 데뷔해서 5,000득점은 꼭 달성하고 싶었는데 코앞에서 끝나버렸죠. 2,000리바운드도 거의 다 됐었는데, 이 기록들은 채우지 못하고 끝난 게 아쉽긴 해요.

Q. 정규리그 600경기 출전은 12명밖에 해내지 못했어요. 프로에 데뷔하던 날 이렇게 오랫동안 많이 뛸 거라 예상했었나요?
전혀요. 저는 항상 불안해하면서 선수 생활을 했어요. 27살에 데뷔하면 32살에 첫 FA가 될 텐데, 그때 은퇴를 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 불안감이 있었죠. 제가 농구를 과격하게하고, 넘어지는 모습도 많다보니 주변에서는 35살이 선수 수명의 한계일거란 말도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매 시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어요. 프로 선수는 계약직이잖아요. 사실 그래서 팬분들이 몇몇 선수들에게 돈을 밝힌다는 모습을 보신다는 건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선수 입장에서는 젊었을 때만 한창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그게 욕심이 아니라 비정규직에 대한 불안함 같은 거니까요.

Q. 말씀하신 27살의 데뷔, ‘군필’이라는 독특한 경력이 눈길을 끌었어요. 프로에서는 운동이 가능한 상무를 다녀와도 적응을 힘들어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이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제가 아마추어 시절에는 농구에 대한 자신감이 정말 컸어요. 중, 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프로에는 무난히 가겠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중앙대에 가게 되면서 부푼 꿈을 안고 있었죠. 스스로 농구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웃음). 지금 보면 어이없는 자신감이었죠. 사람들이 저에게 힘만 세고 투박하게 농구를 한다고 하지만, 전 나름 기술 농구를 한다고 자부를 했어요.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농구부를 나가 군대에 갔다가 다시 복귀를 했던 거죠. 중앙대 특유의 많은 운동량을 견디다보니 기량도 자연스레 늘었고요. 사실 2~3살 어린 동생들하고 운동을 하려다보니 힘들긴 했지만, 돌아온 만큼 다시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포기할 때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때 마음가짐으로 지금까지 버틴 것 같아요.
 

Q. 중앙대 농구부를 떠나 군대에 갔던 이유를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중앙대로 스카우트를 받으면서 신입생 때부터 경기를 많이 뛸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을 들었었어요. 그때 김태환 감독님이 계실 때였는데. 입학하자마자 MBC배 대회를 끝내고 4월에 감독님이 LG로 떠나신 거죠. 멘붕이 왔었어요. 그때는 대학에도 좋은 선수들이 워낙 많아서 매년 좋은 신입생이 들어왔었거든요.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는데 저를 뽑아준 스승님과 3개월 만에 이별했다는 게 너무 힘들었죠. 결국 적응도 못하고 도망도 많이 다니다가 농구부를 그만두고 군대에 가게 된 거에요.

Q. 어떤 부분에서 적응이 힘들었던 건가요?
김태환 감독님이 떠나시고 양문의 감독님이 오셨어요. 용산고 대부라고 불리시던 분인데, 오시자마자 중앙대도 용산고 스타일로 바꾸시기 시작했죠. 그 당시 용산고가 마치 해병대 스타일의 농구라고 불렸거든요. 그런데 저는 말씀드렸듯이 기술 농구가 좋았어요. 아마도 양문의 감독님 스타일에는 그런 모습이 흐느적 거린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를 정말 싫어하셨거든요(웃음). 근데, 양 감독님의 잘못은 아니었어요. 그 시절을 겪고 나서 들었던 생각인데, 훌륭한 선수는 지도자가 바뀌면 새로운 스타일을 빠르게 캐치하고 적응하는 선수더라고요. 저는 실패했던 거죠.

Q. 그럼에도 결국 농구부로 돌아오셨어요. 복귀 때 도움도 많이 받았을 텐데요.
다시 농구를 할 수 있게끔 도와주신분이 광신정산고등학교(현 광신방송예술고)에 계시던 장덕영 선생님이셨어요. 그리고 중앙대 강정수 감독님이 다시 농구부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게 해주셨죠. 강 감독님이 저를 처음 보자마자 ‘딱 일주일만 테스트할거야. 일주일 후에 내가 나가라고 하면 군말 없이 나가’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인생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젖 먹던 힘까지 짜냈던 기억이 나요. 지금 돌아보면 감독님이 저를 내보내실 마음은 없었던 것 같아요. 돌아오자마자 몸은 만들어왔겠거니 하시면서 (윤)호영이하고 1대1을 시키셨는데, 그때 호영이는 1학년이었는데도 대단한 선수였어요. 하지만, 제가 전혀 밀리지 않았죠. 하하.
 

Q. 우여곡절 끝에 프로 진출에 성공했어요. KTF에 지명 받을 당시에 기분이 어땠나요?

5순위로 지명될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어요. 추일승 감독님이 “부산 KTF는 중앙대학교…”라고 하시길래 함지훈, 허효진, 정병국 셋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그 뒤에 ‘박’이라는 글자가 들리더라고요. “어? 박? 그럼 난데?”라면서 어리둥절했거든요. 나이가 있어서 2라운드쯤 뽑히지 않을까 했는데 중앙대에서 가장 빨리 뽑혀서 얼떨떨했어요.

Q. 그만큼 데뷔전을 남다르게 준비하셨을 것 같아요.
남다르기보다는 프로에 처음 왔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비시즌이 시작됐는데 대학 때보다 운동량이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러다가는 살이 찌겠다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요. 그래서 스스로 야간까지 운동량을 늘렸죠.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체중과 컨디션을 유지하고요. 그러면서 이게 프로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아요. 팀이 정해놓은 틀 뿐만 아니라 알아서 경기 출전을 위해 더 노력해야한다는 걸요.

Q. 간절했던 데뷔전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있나요?
데뷔전은 정확히 기억해요. 삼성과의 경기(2007년 10월 20일)였는데, 그때 삼성이 외국선수도 테렌스 레더였고 국내 라인업도 좋았어요. 데뷔전 날 1쿼터 후반에 교체투입해서 총 10득점 7리바운드(2어시스트 2스틸)를 했을 거예요. 나름 성공적인 데뷔전이지 않았나 해요. 교체돼서 처음 코트를 밟는데 엄청 떨리긴 했어요. 그래도 끝나고 추일승 감독님이 “배포 좋네”라는 한 마디를 해주신 덕분에 모든 긴장이 싹 녹아내렸죠.

Q. 사실 박상오 선수하면 프로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한 게 가장 인상적이기도 해요. 자신에게 어떤 포지션이 가장 잘 어울렸던 것 같나요?
역시 편했던 건 4번(파워포워드)이죠. 아마추어 시절부터 가장 오래했던 포지션이잖아요. 근데 196cm라는 제 키가 4번으로서 큰 키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가 슛이 들어가니까 상대 4번을 끌고 나왔던 적이 많죠. 그럼 상대적으로 수비가 발이 느리니까 슛을 던지기도 하고, 역동작으로 드라이브인도 하면서 정말 재밌게 농구를 했던 것 같아요. 그 재미가 최대치였을 때는 단연 데뷔 후 KT 시절이었고요. 그렇게 선수 생활을 하고 나니 지금 국내에 있는 빅맨들도 다 3점슛을 던질 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더라고요. 마치 (강)상재 같은 유형을 ‘스트레치 포’라고 하죠. 이건 지도자들도 다 같이 노력해야 할 부분이에요.

Q. 그런데도 어려움이 있었다고요.
제가 데뷔했을 때는 외국선수가 두 명 모두 장신 센터가 올 때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그 당시 국내 빅맨들은 대부분 그 제도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 입단했을 때도 추일승 감독님이 저를 스몰포워드로 키울 거라고 하셨거든요. MVP가 됐던 시즌에도 3번과 4번을 오가긴 했지만, 사실 3번으로 선발 출전 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어요. 근데 3번으로서의 움직임 쉽게 나오지 않더라고요.
 

Q. 하지만 어려움을 결국 극복하신 거죠. 그래서 역시 최고의 순간을 꼽자면 MVP가 됐던 때가 아닐까요?

그렇죠. 사실 2010-2011시즌에 팀이 정규리그 1위를 하지 못했으면 저도 MVP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그 전까지 정규리그 최다승이 40승이었는데, 저희가 41승을 하면서 기록을 경신해서 기분도 정말 좋았거든요. 다섯 명이 함께하는 농구에서 제가 공헌도가 좋은 편이라 표를 주셨던 것 같은데, 솔직히 그 당시 상위권에 있었던 타팀에는 (김)주성이 형, (서)장훈이 형, (문)태종이 형 등 실력이 더 좋았던 선수들이 많았어요. 제가 1위 프리미엄을 받았던 것 같아요.

Q. 혹시 MVP 시즌이 아니더라도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을까요? 워낙 결정적인 슛을 많이 넣었었잖아요.
딱 두 경기 생각이 나요. 첫 번째는 2011-2012시즌에 전자랜드와의 6강 플레이오프 5차전이에요. 그때 제가 1차 연장이 다 끝나가는 상황에서 3점슛을 쐈는데 안 들어갔거든요. 다행히 종료 부저와 함께 찰스 로드가 팁인을 해줘서 2차 연장에 갔고, 4강에 갈 수 있었어요. 역적이 될 뻔했죠(웃음). 안도감과 함께 왔던 짜릿함이 생각나요. 두 번째는 그 다음 시즌에 SK로 이적하고 나서 오리온스 원정을 떠났을 때였어요. 그때는 제가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가는 동점 3점슛을 넣었죠. 코너에서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로 던졌는데 날아가는 걸 보니 궤도가 정확하더라고요. 뒷머리가 쫙 섰던 기억이 나네요.

Q. 팬들은 다시 KT로 돌아왔을 때 SK 전에서 26점차 역전극을 펼친 것도 많이 기억하더라고요. 그날 26점을 넣으셨잖아요.
그때는 SK가 바보였어요. 하하. 저는 그저 고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크게 점수가 뒤처지면 어린 선수들은 주눅 들게 마련이거든요. 그럼 고참들이 총대를 메야죠. 저는 항상 그런 마인드였어요. 그날도 찬스만 났다하면 던졌거든요. 그런 말이 있어요. 슛은 일단 던져놔야한다고.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는 하늘에 맡기라면서요. 근데 그날은 다 들어갔었네요.
 

데뷔 4시즌 만에 MVP의 영예까지 안았던 박상오. 그는 KT에서의 영광의 시절을 뒤로 하고 FA 신분으로서 SK로 떠났고, 생애 첫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했지만 준우승으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후 다시 친정팀 KT로 돌아왔으나 예전의 명성을 찾기는 쉽지 않았고, 결국 은퇴의 기로에 놓였다가 오리온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선수 생활이었다. 하나, 박상오가 선수 생활 그래프와 다르게 변치 않았던 부분도 있었다. 프로 마인드를 잃지 않아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고, 후배들에게는 늘 든든한 선배였다. 그 덕분일까. 박상오는 참 많은 이들의 추억 속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었다.


Q. 은퇴 발표를 하고 나서 신기성 해설위원이 ‘애틋함이 느껴지는 동생’이라고 하셨어요. 박상오 선수에게 신기성 위원은 어떤 형이었나요?
일단 기성이 형한테 많이 혼났죠(웃음). 한 번은 KT 시절 코치님이었던 김승기 감독님한테 엄청 혼나고 있었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화를 못 참고 순간 표정의 변화를 확 줬던 적이 있었어요. 그 모습을 기성이 형이 보고 따로 불러서 엄청 혼냈죠. 그러면 안 된다고. 근데 평소에는 저를 많이 타일러주기도 하고 위로도 해줬어요. 언젠가 KTF 시절 성적이 너무 안 좋았던 때였는데요. 부산에서 경기하고 서울에 올라오던 중이었어요. 다음 날이 외박이어서 도착하자마자 헤어지는 상황이었는데, 서울에 오니 이미 시간이 다음 날 새벽 3시더라고요. 그래서 기성이 형이 성적도 좋지 못해서 속상하고 우울할 텐데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소주 한 잔 하자고 했었거든요. 그 길로 포장마차에 가서 아침까지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나요. 비록 꼴찌를 하고 있었지만, 인생 얘기를 하며 마음을 털 수 있는 좋은 형이었어요.

Q. SK에서 함께했던 김선형 선수는 ‘최고의 리더’라는 말을 했었어요. 사실 그 당시 SK가 1가드-4포워드라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화를 줄 때잖아요. 첫 이적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1가드-4포워드의 비화를 알려드릴게요. 문경은 감독님이 얘기를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감독님과 선수들이 맥주 한 잔 하며 치킨을 먹을 때였어요. 감독님이 김민수, 최부경이 있는 상황에서 애런 헤인즈를 3번으로 쓸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먼저 슈팅가드로 뛰겠다고 했던 거죠. 당시에 2대2가 트렌드가 됐을 때고, 제가 2번으로 나가면 상대 선수와 미스매치도 가능해지잖아요. 올 스위치를 하며 투맨 게임을 기동력 있게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건의를 먼저 드렸던 거죠. 사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헤인즈와 3번 포지션으로 겹치면 제 출전 시간도 줄어들기 때문에, 많이 뛰기 위한 생존 전략이기도 했어요.

Q. 좋은 인연들과 좋은 추억을 남겼던 것 같네요. 그렇다면 프로 커리어에 있어 가장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감독님과 선수들을 꼽아보자면요.
워낙 많은 감독님들과 함께 해서 부담스러우니, 선수만 꼽을게요. 하하. 선수라고 한다면 (송)영진이 형과 (이)현준이 형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고 하고 싶어요. 영진이 형은 제가 KTF 신인 시절에 적응을 정말 많이 도와주셨던 분이에요. 코치가 된 이후에도 저를 베테랑으로서 대우해준 게 많았어요. 현준이 형은 제가 SK에 처음 갔을 때 주장이었는데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줬죠.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Q. 이토록 좋은 추억들이 많지만, KT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좋지 않은 성적에 마음고생도 있었을 텐데요.

부상자도 많았고, KT가 야심차게 크리스 다니엘스를 영입했었는데 햄스트링 부상을 한 번 당하더니 결국 몇 달이 지나도 제대로 뛰지 못했었죠. 비시즌에 그렇게 고생하고, 전지훈련에서도 좋은 성과를 냈었는데 개막을 앞두고 그러니까 모든 게 무너지더라고요. 국내선수도 중요하지만, 외국선수 농사가 시즌의 절반을 판가름한다고 하잖아요. 조금 허탈한 느낌이 있었죠.

Q. 그럼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역시 이때였을까요?
그렇죠. KT에 돌아오고 나서의 3년이요. 데뷔해서 부산에 있었을 때는 엄청난 환호와 응원을 받았었는데, 다시 컴백했을 때는 온갖 비난과 책임론에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고액 연봉자는 찬사를 받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비난을 감수해야하는 자리잖아요. 그래서 혼자 끙끙 앓았던 것 같아요.

Q. 남들이 몰라줘서 속상했던 건 없었을까요.
그건 잘못된 말인 것 같아요. 프로농구 선수면 농구를 잘 해야 해요. 저는 스스로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하루에 운동을 두 번하는 선수와 네 번하는 선수가 있으면 네 번하는 선수가 무조건 출전을 해야 할까요? 농구를 잘하는 선수를 뛰게 해야죠. 물론 선수의 노력에도 기회가 주어져야하는 것도 맞지만, ‘왜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지’라는 건 프로의 마인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팬들은 잘 하는 농구를 보고 싶어 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속상함은 없었어요.

Q. 멋진 마인드네요. 함께한 동료들로 BEST5를 뽑아볼까요?
김선형-조성민-박상오-송영진-헤인즈 이렇게 할게요. 선형이는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가드잖아요. 함께 뛴 게 영광일 정도죠. 제가 중앙대 4학년일 때 입학을 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미리 팀에 와서 한양대와 경기를 하는데 10분여만에 14점을 넣으면서 코트를 휘젓더라고요. 조성민도 마찬가지로 자타공인 최고의 슈터죠. 2대2 능력은 국내 탑이었고요. 부연설명이 필요할까요? 하하. 저는 원래 4번이 좋지만, 영진이 형을 뽑기 위해 절 3번에 놨어요. 영진이 형은 너무 저평가된 선수에요. 농구 지능은 한국 최고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같이 뛸 시절에 형이 전성기였는데도 저와 성민이 때문에 공격을 많이 양보하기도 했어요. 함께 뛰면 정말 편했던 동료죠. 마지막으로 헤인즈도 말이 필요 없잖아요. 골을 넣으라고 하면 넣는 선수였으니까요. 외국선수 중에서는 최고였어요.
 

Q.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요?

언젠가는 잊혀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항상 열심히 했던 선수로 추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스토리는 참 충분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많이 힘들어했고, 농구도 완전히 포기할 뻔 했고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축하를 받으면서 떠나니까 희망의 아이콘으로 기억해주시길 바래요.

Q. 마지막으로 은퇴 후 계획을 전해주시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죠.
지도자의 길을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농구계에서 어느 포지션이든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다보면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지도자 욕심은 사실 많아요(웃음). 집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며 모아놨던 자료들을 공부 중이에요. NBA도 많이 보고 있고요. 앞으로도 아마추어 농구부터 유소년 농구, 여자프로농구까지 볼 수 있는 농구는 다 보면서 열심히 제2의 인생을 준비하겠습니다!

BONUS ONE SHOT | 희망의 아이콘이 후배들에게 전한 제언
최근에 (하)승진이, (전)태풍이 형부터 (이)관희까지 한국농구가 ‘망했다, 안 망했다’하면서 이슈가 됐었잖아요. 저는 사실 농구라는 이 구기종목이 현재 정도면 인기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국제경쟁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사실 스포츠계를 벗어나 사람들이 즐길 컨텐츠들이 워낙 늘어났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도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후배들이 현재에 안주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팬들이 농구를 보러 농구장에 오면 재미가 있어야 해요. 요즘에는 구단들이 이벤트도 많이 신경을 쓰지만, 결국 농구가 재밌어야하고, 그러려면 살 길은 공격농구만이 답이라고 생각해요. 저때까지만 해도 보통의 선수들은 수비를 하나 놓치면 눈치를 정말 많이 봤었어요. 공격 생각은 하지도 못했죠. 근데 저는 눈치 보지 않고 상대에게 멋있게 되갚아주겠다는 마인드였거든요. 

팬들은 쇼다운을 보고 싶어 해요. 사소한 신경전이라도 그게 팬들에게는 재미거든요. 저는 훈련 시간이 2시간이라면 그 중 1시간 40분은 공격 훈련을 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지난 시즌에 (허)훈이가 그 답을 증명한 게 아닐까요. 공격적으로 수비수를 요리하잖아요. 수비 하나를 확실히 제칠 수 있는 플레이들이 나와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구단과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야 하고요. 유니폼을 내려놓으면서 후배들에게 눈치 보지 말고 농구하라는 말을 해주고 떠나고 싶습니다.

박상오 프로필_
1981년 3월 24일생, 포워드, 195cm/102kg, 봉천초-광신중-광신정보고-중앙대
2007~2012 부산 KT(1라운드 5순위)
2012~2015 서울 SK
2015~2018 부산 KT
2018~2020 고양 오리온

수상이력_
2010-2011시즌 정규리그 MVP, BEST5
2010-2011시즌 12월 월간 MVP
2014-2015시즌 12월 월간 MVP

# 장소 제공_ 카페캠프통 압구정살롱(서울 강남구 압구정로42길 27)
# 인터뷰 사진_ 박상혁 기자
# 경기 사진_ 문복주, 이청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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